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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
작성일
2023.10.23
첨부파일0
조회수
15
내용

사준이 반사적으로 되물었고 태희는 침착하게 다시 한번 대답해 주었다. “나 아이 가졌다고. 우리 아이.”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사준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뭘 그런 표정까지 지으실까. 기뻐하지 않을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언짢은 건 어쩔 수 없다. 목이 탄 건지, 답답한 건지, 사준이 얼음을 입에 넣고 또다시 아드득 씹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태희는 가만히 있었다. 그냥 기다림이 답인 것 같았다. 한참 후 여전히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사준이 물었다. “왜.” 그 첫마디가 우스워서 태희는 피식 웃어 버렸다. “왜긴 왜야, 너랑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생겼겠지. 더 정확히 말해 줘? 희박한 1%의 확률, 그거 네가 뚫었다고.” “…….” “넌 아직이지만 난 그 행동에 대한 결과를 이미 책임지고 있는 중이고.”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쉰 사준이 손으로 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내리뜬 눈꺼풀에 실린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잠시 창밖을 보았다가 다시 태희에게 시선을 돌린 사준은 처음보단 정신을 차린 표정이었다. “얼마나 됐어.” “이제 8주 차.” 8주 차, 태희의 말을 나지막하게 따라 한 사준이 다시 물었다. “너는 안 지 얼마나 됐는데.” 사준의 질문에 태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것까지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하냐에 따라 책망이라도 할 것처럼 바라보는 사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태희는 선선히 말했다. “처음 의심한 건 너랑 팥빙수 먹으러 갔던 날.” 사죽은 나지막하게 끙 소리를 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예쁘게도 웃으면서 아이가 귀엽지 않냐고 묻던 민태희가, 그런 민태희를 보느라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자신이. 이상한 질문을 하며 헤어지기 전까지 이상하게 굴던 민태희가, 그런 민태희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말없이 보내 주었던 자신이. 그 날의 민태희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왜 이상하게 굴었는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는지. “나도 무섭고 심란해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어.” 태희가 한숨처럼 흘린 말에 사준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메시지 하나 덜렁 보낸 후에 잠수를 탄 거고?” “……!” “내가 그 일주일 동안 별생각을 다 했는데, 얼마나 미치는 줄 알았는데.” 태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속 좁게 그걸 트집 잡고 싶냐는 것처럼. 하지만 사준도 민태희 앞에선 평범한 사람이고 사랑에 빠진 남자일 뿐이었다. 정말 별생각 다 하고 별 미친 짓까지 다 하려고 했으니까. 실제로 실천하다 말았지만. “내가 강사준 너보다 더 했어. 별생각 다 했고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거든. 털어놓을 친구도 없고 엄마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사준도 그건 인정해야 했다. 임신이라니. 이렇게 듣는 자신도 심란하고 무섭고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인데 민태희는 어땠을까. “인터넷으로 폭풍 검색하니까 임신하면 아이 심장 소리까지 확인해야 된대. 그래서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에 병원 가서 임신 확인한 거고.” 그렇다면 민태희는 임신을 확인한 다음 날 자신을 찾아와서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끝내자고 말한 거였다. 그것도 우리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사준은 그게 화가 나고 억울했다. 민태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직도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이거 하난 확실히 알았다. 민태희가 임신을 의심한 그 순간부터 자신도 알아야 했다는 것. “왜 말 안 해 줬어.” “너 같으면 말하겠어? 아이가 그렇게 끔찍하게 싫다는데.” “남자들은 거의 그래. 아이 좋아하는 남자가 몇이나 된다고.” 투덜거리듯이 사준이 한 말에 태희는 어이없다는 눈빗으로 노려보았다. “고정관념이야. 아이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거든?” “그래서, 내가 너 안 찾아왔으면 끝까지 말 안 하고 혼자 키울 생각이었어?” 더 낮게 가라앉은 사준의 음성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 걸까. 태희는 이상하게 혼나는 기분이었다. “그건 아니야. 시기의 문제였을 뿐 말은 하려고 했어. 네가 싫다면 혼자 키울 생각까지 하긴 했지만.” 이번엔 사준이 꽤 무서운 눈빛으로 태희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차분히 받아 내자 결국 사준이 졌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 진짜 민태희 너한테 물어볼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았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음성에 억울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임신이란 말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사준이 침착한 표정으로 태희를 보았다. “하나만 대답해 줘, 임신했으면서 왜 나한텐 헤어지자고 하고 민선태를 찾아가서 맞선 보겠다고 한 건지.” 사준의 질문에 태희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민연서라면 그 날 바로 강사준에게 전화했을 게 뻔하기에. “아이 핑계로 결혼하자고 할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임신했다고 말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까지 너한테 이용당하는 건 너무 싫은데.” 하아, 사준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민태희, 넌 진짜 날 뭘로 보냐.” “내가 말했잖아, 너 사랑한다고. 그래서 네 마음을 확인해야 했어. 날 정말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사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니 강사준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눈치 없고 둔한지 알겠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마음을 표현할 만큼 표현했다. 눈빛과 표정으로, 사준에게 안길 때마다 온몸으로. “네 귀에 들어가게 하려고 민선태를 이용한 것뿐이야. 그 말 듣고도 네가 날 안 찾아오면 진짜 깨끗하게 미련 버리려고.” 조용히 듣고 있던 사준이 정말 쓸데없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송제현 그 X끼가 좋아서 날 찬 게 아니란 거지.” “그 이름이 거기서 왜 나와? 그때 말했잖아, 송제현한테 미련 없다고.” 태희가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나한테 헤어지자 해 놓고 집 앞에서 둘이 같이 있었잖아. 나한테는 그렇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아주 눈꼴 사납게 다정하게 있던데.” 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떠오르자 태희도 발끈했다. “그래, 나 그날 펑펑 울었다 어쩔래! 오란 놈은 안 오고 이상한 놈이 와서 귀찮게 구는데 너무 서럽고 짜증 나서! 네가 그 마음을 알아? 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데!” “그런다고 송제현 그 X끼 앞에서 그렇게 울어? 그것도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서?” 두 사람 모두 꿈에도 몰랐다. 연애할 때도 하지 않았던 유치한 사랑싸움을 이제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꼴 보기 싫었으면 달려와서 뜯어 놨어야지!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 해!” 그 한마디에 사준의 입이 거짓말처럼 다물렸다.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씰룩거리는 입꼬리로 슬그머니 묻는다. “민태희 너 내 여자야?” “너 진짜 또라인 거 알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묻고 싶냐. 어이가 없는데 그래서 태희는 더 화가 났다. 가슴 안의 서러운 찌꺼기들을 우르르 쏟아 내고 싶었다. “너 때문에 울었는데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그러니까 네가 좀 더 빨리 왔으면 내가 송제현과 부딪……?” 잠깐, 송제현이 찾아온 날이라면 사준에게 이별을 고했던 날이도 했다. “강사준, 너 그날 바로 나 찾아왔었어? 12시간도 안 지나서?” 사준은 아차 싶은 얼굴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왔으면 보고 갈 것이지, 왜 그냥 가?” 내가 울고 있는데,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났는데. “너 같으면 눈이 안 돌겠냐. 사고 칠 것 같아서 돌아간 거지.” 툭 쏘아붙이는 사준은 그때를 떠올리며 또 열 받아 하는 얼굴이었다. “질투했구나? 나랑 제현 선배 같이 있는 거 보고.” 사준이 뽀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걸 보자 태희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젠 정말 강사준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서. 참 멀리도 힘들게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는데 사준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선태한텐 맞선 안 본다고 말해. 그리고 민태희 넌 나랑 결…….” “너랑 결혼 안 해.” 태희는 사준의 말을 차분히 끊었다. “아빠 노릇 하겠다는 건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나에 대한 네 마음을 아직 믿기는 힘들어.” “…….” “널 믿기엔 너를 너무 잘 알아. 네가 서문의 후계자가 되기 싫어하고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하기도 싫어하는 지금 네 상황, 익숙하고 편한 내가 좋아서 도저히 나를 포기 못 하는 네 마음. 네가 그걸 사랑이랑 헷갈려하는 걸 수도 있잖아.” 거짓말이었다. 태희는 이제 사준을 믿었다, 믿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대체 내가 뭘 해야 믿어 줄 건데.” 드디어 기다렸던 말이 나왔다. 그래서 태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 회장님이랑 화해해. 살가운 부자까진 아니더라도 남처럼 지내지는 말라는 뜻이야. 화해한 김에 서문의 후계자가 되면 더 좋고.” 사준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을 잘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태희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오로지 배 속의 일프로를 위해서. 쓸쓸히 자라지 않기를 바라고 모두에게 사랑받길 바라고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든든한 배경까지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너도 알잖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두 가지는 내가 싫어하는 거.” 창밖을 바라보는 사준의 눈빛이 살벌했다. 그럼에도 죽어도 안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널 믿을 수 있다는 거야. 널 믿으면 결혼 못 할 이유도 없고.” “…….” “강사준.” 태희가 부르자 사준은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고집스러운 새까만 눈을 바라보며 태희는 싱긋 웃었다. “이왕 사랑하는 거, 사랑하는 여자를 서문의 작은 사모님 만들어 주면 안 돼? 나도 야욕 있는 여자야.” 미치겠네, 작게 중얼거린 사준이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사준을 믿기로 했다.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정성이면 그 비슷한 마음일 거라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도 이 말을 한 건 희구와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사준이 한 번 더 갈등하며 자신에 대한 감정을 다시 한번 더 깨닫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도전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아이에게 든든한 할아버지와 서문이라는 짱짱한 배경까지 선물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 서문 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태희는 으리으리한 내부를 훑어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강 회장은 벌써 세 번째 보는 거지만 이렇게 본사에서 만나자고 하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강사준 때문에 서문 그룹 회장실까지 다 와 보는구나.” 사준을 만난 후 이틀째 되는 날 서문 강 회장과 만나기로 했다. 급하게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애가 달은 강 회장이 30분 정도 짬이 나니 본사로 와 달라고 한 거였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열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태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강 회장이 아닌 우아하게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낯선 여자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자신보다 윗사람인 건 분명한데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인사하기도 좀 그렇고, 누구냐고 묻는 것도 그렇고. 태희는 차분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뒤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비서가 보였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지금 회장님 손님이 와 계시다고…….” 여자가 희고 고운 손을 조용히 들어 올리자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또각또각. 고운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여자는 천천히 태희에게 다가왔다. 바로 앞에 멈추어 선 후 태희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여자의 눈빛은 싸늘했고 경멸이 가득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더럽게 감히.”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여자는 다짜고짜 손부터 들어 올렸다. 그 손이 얼굴에 가까이 다가온 순간, 태희는 기가 막힌 반사신경으로 피했다. 당연히 맞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태희가 가뿐히 피하자 당황한 여자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태희는 앙칼지게 물었다. “아줌마, 저 아세요?” 분위기는 우아하고 고상한데,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 왜 초면인 사람한테 손찌검부터 하려는 건지. 꾹 다물린 여자의 입꼬리가 눈꼬리처럼 파르르 떨렸다. “봐요, 모르시잖아요. 그럼 말로 하셔야지 몰상식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뭐…… 몰상식?” “우선 손은 놔드릴 테니까 곱게 두세요. 그리고 만약 저 때리시면, 정당방위 차원으로 이자까지 해서 두 대 때릴 거예요.” 기겁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난 여자는 더러운 걸 보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 내 스타베팅 집무실에서 꺼져.” 그제야 태희는 눈 앞의 여자가 사준의 새어머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태희가 아는 사준의 새어머니는 남편의 사생아까지 그럴싸하게 키운 인내심 강한 여자였다. 속으로는 죽도록 사준이 단명하길 기도하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엄마인 척, 자비로운 서문의 사모님인 척.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감정 조절도 못 하고 뒤에 누가 있든 말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열린 문 너머로 복도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강 회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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